문학은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주체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는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되돌아보고 날카롭게 고발한다.
질문하는 일은 우리에게 지금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우리도 호모사피엔스이니까요. 묻는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아직, 기계는 많은 경우 입력된 정보를 질문 없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곧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기계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능동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왜, 뭔데, 하고 물으며 주위를 받아들이면서 한 명의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은 사유의 한 행위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개념이나 미리 규정되어 내려오는 가치들을 선험적으로 무조건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질문은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한계짓는 체제를 거스르면서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단순 부속품이 되지 않으려면 질문해야 합니다. 또한, 질문하는 일은 반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반성한다는 것은 판단의 조건들을 성찰하고 사유한다는 것으로 곧 돌이켜보는 일이죠. 반성은 모두가 확고하다고 여기는 현재의 질서에서 잠시 벗어나는 질문입니다.
장자가 산속을 거닐다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는데 벌목하는 사람들이 그 옆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 나무를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구나.” 장자가 산에서 나와 옛 친구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친구가 기뻐하며 아이 종에게 거위를 잡아서 요리하라고 시켰더니, 아이 종이 여쭙기를 “한 마리는 잘 우는데,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것을 잡을까요?” 하였다. 친구가 말했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다음 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중의 나무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고 지금 주인집 거위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몸을 두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물 것이다. 그런데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무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아직 완전한 올바름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의 번거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道)와 덕(德)을 타고 어디든 정처 없이 떠다니듯 노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명예도 없고 비방도 없이 한번은 하늘에 오르는 용이 되었다가 또 한번은 땅속을 기는 뱀이 되어 때와 함께 변화하면서 한 가지를 오로지 고집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한번 하늘 높이 올라가고 한번 땅속 깊이 내려감에 조화로움을 도량으로 삼아서 만물의 시초에 자유롭게 노닐며, 만물을 만물로 존재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외물(外物)에 의해 사물로 규정 받지 않으니 어떤 외물이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옛날 신농과 황제가 지켰던 삶의 법칙이다.”
과학기술자는 과학의 양면을 제대로 파악하여 인류의 복지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려는 선한 의도와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과학이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과학 기술자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전문가로서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책임과 자기 정당화의 의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과학적 지식을 사회의 선을 위해 사용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성적 사고이다. 반성적 사고를 통해 과학 기술은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따라서 반성적 사고는 과학기술자들의 행위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자들이 인류에 해악을 끼치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20세기 후반 수소폭탄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그는 동서 냉전의 상황에서 조국의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개발에 매진하여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옳았던가를 되짚어 보며, 나중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영국의 제너는 18세기 후반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우두법(牛痘法)을 개발했다. 시행 초기에는 대중의 몰이해로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 그는 우두법의 효능을 확신하고 설득에 나섰다. 이후 영국 과학계로부터 그 효능을 인정받아 우두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문학은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주체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는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되돌아보고 날카롭게 고발한다.
질문하는 일은 우리에게 지금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우리도 호모사피엔스이니까요. 묻는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아직, 기계는 많은 경우 입력된 정보를 질문 없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곧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기계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능동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왜, 뭔데, 하고 물으며 주위를 받아들이면서 한 명의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은 사유의 한 행위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개념이나 미리 규정되어 내려오는 가치들을 선험적으로 무조건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질문은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한계짓는 체제를 거스르면서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단순 부속품이 되지 않으려면 질문해야 합니다. 또한, 질문하는 일은 반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반성한다는 것은 판단의 조건들을 성찰하고 사유한다는 것으로 곧 돌이켜보는 일이죠. 반성은 모두가 확고하다고 여기는 현재의 질서에서 잠시 벗어나는 질문입니다.
장자가 산속을 거닐다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는데 벌목하는 사람들이 그 옆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 나무를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구나.” 장자가 산에서 나와 옛 친구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친구가 기뻐하며 아이 종에게 거위를 잡아서 요리하라고 시켰더니, 아이 종이 여쭙기를 “한 마리는 잘 우는데,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것을 잡을까요?” 하였다. 친구가 말했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다음 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중의 나무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고 지금 주인집 거위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몸을 두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물 것이다. 그런데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무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아직 완전한 올바름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의 번거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道)와 덕(德)을 타고 어디든 정처 없이 떠다니듯 노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명예도 없고 비방도 없이 한번은 하늘에 오르는 용이 되었다가 또 한번은 땅속을 기는 뱀이 되어 때와 함께 변화하면서 한 가지를 오로지 고집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한번 하늘 높이 올라가고 한번 땅속 깊이 내려감에 조화로움을 도량으로 삼아서 만물의 시초에 자유롭게 노닐며, 만물을 만물로 존재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외물(外物)에 의해 사물로 규정 받지 않으니 어떤 외물이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옛날 신농과 황제가 지켰던 삶의 법칙이다.”
과학기술자는 과학의 양면을 제대로 파악하여 인류의 복지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려는 선한 의도와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과학이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과학 기술자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전문가로서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책임과 자기 정당화의 의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과학적 지식을 사회의 선을 위해 사용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성적 사고이다. 반성적 사고를 통해 과학 기술은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따라서 반성적 사고는 과학기술자들의 행위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자들이 인류에 해악을 끼치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20세기 후반 수소폭탄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그는 동서 냉전의 상황에서 조국의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개발에 매진하여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옳았던가를 되짚어 보며, 나중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영국의 제너는 18세기 후반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우두법(牛痘法)을 개발했다. 시행 초기에는 대중의 몰이해로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 그는 우두법의 효능을 확신하고 설득에 나섰다. 이후 영국 과학계로부터 그 효능을 인정받아 우두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문학은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주체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는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되돌아보고 날카롭게 고발한다.
질문하는 일은 우리에게 지금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우리도 호모사피엔스이니까요. 묻는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아직, 기계는 많은 경우 입력된 정보를 질문 없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곧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기계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능동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왜, 뭔데, 하고 물으며 주위를 받아들이면서 한 명의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은 사유의 한 행위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개념이나 미리 규정되어 내려오는 가치들을 선험적으로 무조건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질문은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한계짓는 체제를 거스르면서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단순 부속품이 되지 않으려면 질문해야 합니다. 또한, 질문하는 일은 반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반성한다는 것은 판단의 조건들을 성찰하고 사유한다는 것으로 곧 돌이켜보는 일이죠. 반성은 모두가 확고하다고 여기는 현재의 질서에서 잠시 벗어나는 질문입니다.
두 제시문을 따로 요약하면 '유사성'이 아닙니다. 문학은 억압을 보여 주고 질문은 규정된 질서를 거스른다는 점에서 '현재의 질서를 되돌아보게 하는 반성'이라는 하나의 구조로 묶어야 합니다.
문학은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주체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는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되돌아보고 날카롭게 고발한다.
장자가 산속을 거닐다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는데 벌목하는 사람들이 그 옆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 나무를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구나.” 장자가 산에서 나와 옛 친구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친구가 기뻐하며 아이 종에게 거위를 잡아서 요리하라고 시켰더니, 아이 종이 여쭙기를 “한 마리는 잘 우는데,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것을 잡을까요?” 하였다. 친구가 말했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다음 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중의 나무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고 지금 주인집 거위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몸을 두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물 것이다. 그런데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무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아직 완전한 올바름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의 번거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道)와 덕(德)을 타고 어디든 정처 없이 떠다니듯 노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명예도 없고 비방도 없이 한번은 하늘에 오르는 용이 되었다가 또 한번은 땅속을 기는 뱀이 되어 때와 함께 변화하면서 한 가지를 오로지 고집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한번 하늘 높이 올라가고 한번 땅속 깊이 내려감에 조화로움을 도량으로 삼아서 만물의 시초에 자유롭게 노닐며, 만물을 만물로 존재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외물(外物)에 의해 사물로 규정 받지 않으니 어떤 외물이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옛날 신농과 황제가 지켰던 삶의 법칙이다.”
(다)를 '무용도 쓸모 있다'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장자의 ‘완전한 올바름’은 유용·무용 판단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가)가 문학의 무용을 다시 유용함으로 환치하려는 점에서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까지 가야 합니다.
문학은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주체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는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되돌아보고 날카롭게 고발한다.
질문하는 일은 우리에게 지금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우리도 호모사피엔스이니까요. 묻는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아직, 기계는 많은 경우 입력된 정보를 질문 없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곧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기계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능동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왜, 뭔데, 하고 물으며 주위를 받아들이면서 한 명의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은 사유의 한 행위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개념이나 미리 규정되어 내려오는 가치들을 선험적으로 무조건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질문은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한계짓는 체제를 거스르면서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단순 부속품이 되지 않으려면 질문해야 합니다. 또한, 질문하는 일은 반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반성한다는 것은 판단의 조건들을 성찰하고 사유한다는 것으로 곧 돌이켜보는 일이죠. 반성은 모두가 확고하다고 여기는 현재의 질서에서 잠시 벗어나는 질문입니다.
장자가 산속을 거닐다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는데 벌목하는 사람들이 그 옆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 나무를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구나.” 장자가 산에서 나와 옛 친구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친구가 기뻐하며 아이 종에게 거위를 잡아서 요리하라고 시켰더니, 아이 종이 여쭙기를 “한 마리는 잘 우는데,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것을 잡을까요?” 하였다. 친구가 말했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다음 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중의 나무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고 지금 주인집 거위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몸을 두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물 것이다. 그런데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무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아직 완전한 올바름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의 번거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道)와 덕(德)을 타고 어디든 정처 없이 떠다니듯 노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명예도 없고 비방도 없이 한번은 하늘에 오르는 용이 되었다가 또 한번은 땅속을 기는 뱀이 되어 때와 함께 변화하면서 한 가지를 오로지 고집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한번 하늘 높이 올라가고 한번 땅속 깊이 내려감에 조화로움을 도량으로 삼아서 만물의 시초에 자유롭게 노닐며, 만물을 만물로 존재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외물(外物)에 의해 사물로 규정 받지 않으니 어떤 외물이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옛날 신농과 황제가 지켰던 삶의 법칙이다.”
과학기술자는 과학의 양면을 제대로 파악하여 인류의 복지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려는 선한 의도와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과학이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과학 기술자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전문가로서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책임과 자기 정당화의 의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과학적 지식을 사회의 선을 위해 사용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성적 사고이다. 반성적 사고를 통해 과학 기술은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따라서 반성적 사고는 과학기술자들의 행위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자들이 인류에 해악을 끼치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20세기 후반 수소폭탄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그는 동서 냉전의 상황에서 조국의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개발에 매진하여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옳았던가를 되짚어 보며, 나중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영국의 제너는 18세기 후반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우두법(牛痘法)을 개발했다. 시행 초기에는 대중의 몰이해로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 그는 우두법의 효능을 확신하고 설득에 나섰다. 이후 영국 과학계로부터 그 효능을 인정받아 우두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두 사람을 칭찬·비난으로만 나누면 종합이 아닙니다. 사하로프는 핵개발 시기엔 애국심이라는 유용함에 경도되고 이후 질문과 반성으로 태도가 바뀐 점, 제너는 유용하려 했고 실제로 유용했으며 책무의식을 가졌다는 점을 세 제시문의 기준으로 각각 풀어야 합니다.